나카하라 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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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하라 주야는 일본의 시인으로, 1907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1937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으며, 《염소의 노래》, 《지난 날의 노래》 등의 시집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난해하고 고백적인 특징을 가지며, 삶의 고통과 우울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후 그의 작품은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야마구치시는 그의 업적을 기려 나카하라 주야 상을 제정했다.
나카하라 주야는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에서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카시무라 켄스케와 어머니 나카하라 후쿠 사이에서 태어났다. 켄스케는 나카하라 후쿠와 결혼 후 나카하라 가문에 입양되어 성을 나카하라로 바꾸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히로시마와 가나자와로 파견되었고, 가족은 그를 따라갔다. 1914년에 야마구치로 돌아왔다. 1917년 겐스케는 현재 나카하라 주야 기념관이 있는 곳에 진료소를 설립했다.[1]
나카하라 주야의 시는 다소 난해하고 고백적이며, 시인의 삶 전반에 걸쳐 끊이지 않았던 고통과 우울이라는 일반적인 인상을 준다.[4] 초기에 나카하라는 일본 전통의 단카 형식을 선호했지만, 십 대 시절에 다다이스트 시인 다카하시 신키치와 도미나가 타로가 주창한 현대 자유시 스타일에 매료되었다. 도쿄로 이주한 후,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카 쇼헤이와 함께 시 전문 잡지 《백치군(白痴群)》을 창간했다. 그는 고바야시 히데오와 친구가 되었고, 고바야시는 그에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을 소개했으며, 나카하라는 그들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랭보의 영향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보헤미안" 생활 방식으로도 이어졌다.
나카하라 주야의 주요 작품은 시집과 번역 시집으로 나눌 수 있다.
2. 생애
부모는 결혼 후 6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고, 나카하라 가문의 고향에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첫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며 사흘 동안 축하했다. 나카하라는 의사의 장남이었기에 의사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아버지의 높은 기대 때문에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켄스케는 마을의 공공 도덕을 걱정하여, 아들이 자신들과 다른 계층의 아이들과 밖에서 노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남동생들과 달리 익사할까 봐 강에서 목욕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2] 성장하면서 심한 처벌도 받았는데, 흔한 처벌은 벽을 보고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담뱃불로 발뒤꿈치를 지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장 큰 처벌은 헛간에 가두는 것이었는데, 츄야는 형제들에 비해 수십 번이나 이 처벌을 받았다.[3]
나카하라는 중학교 시절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신동으로 불렸다. 8살이던 1915년, 남동생 쓰구로의 죽음은 그를 문학에 눈뜨게 했다. 슬픔에 잠긴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자신의 첫 세 구절을 여성 잡지와 지역 신문에 투고했다. 같은 해, 그는 뛰어난 성적으로 야마구치 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엄격함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았고, 문학에 점점 더 몰두하면서 그의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켄스케는 문학이 아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극도로 두려워했다. 한 번은 나카하라가 숨겨둔 소설을 발견하고 그를 심하게 꾸짖고 다시 헛간에 가두었다. 이 무렵 나카하라는 또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여 그의 성적을 더욱 떨어뜨렸다.
1923년, 그는 3학년 시험에 불합격했다. 이 실패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실패하지 않는 한, 그는 엄격한 부모의 감시 아래 남겨져야 했다. 켄스케는 그 소식을 듣고 깊은 굴욕감을 느껴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시 아들을 때리고 3월의 추운 밤에 헛간에 가두는 데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는 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이는 결국 아버지의 패배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 그의 "교육 정책"에 대한 사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건들을 감안하여, 그는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 중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나카하라는 혼자 살기 시작했지만,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교토에서 그는 다다이즘 시인 다카하시 신키치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세 살 연상의 여배우 하세가와 야스코를 만났고, 1924년 4월에 그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주야가 동료 시인 토미나가 타로와 친구가 된 것도 바로 이 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주야와 야스코는 토미나가 타로를 따라 도쿄로 가서 그곳에서 대학에 다닐 것을 결정했다. 그는 서류 부족이나 늦은 이유로 시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예비 학교에 다닐 것을 조건으로 가족에 의해 보내졌다.
1926년 예비 과정을 중퇴한 후, 그는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카 쇼헤이를 만나 함께 시 전문 잡지 《백치군(白痴群)》을 창간했다. 그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친구가 되었고, 고바야시는 그에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을 소개해주었으며, 나카하라는 그들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랭보의 영향은 그의 시에만 머물지 않았고, 나카하라는 그의 "보헤미안" 생활 방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카하라는 일본의 하이쿠와 단카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5음절과 7음절의 수를 차용했지만, 리듬감 있고 음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이러한 음절 수를 변형하여 빈번하게 사용했다. 그의 시 중 몇 편은 노래 가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음악적 효과는 처음부터 신중하게 계산되었을 수 있다. 주야의 작품은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고, 그는 주로 고바야시 히데오와 함께 창간한 《야마마유》를 포함한 소규모 문학 잡지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는 1925년 11월 하세가와 야스코가 나카하라를 떠나 고바야시 히데오와 함께 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고바야시와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1927년 12월, 그는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를 만나 나중에 그의 시를 음악으로 각색했는데, 예를 들어 《아사의 노래(朝の歌)》(朝の歌|아침의 노래일본어)와 《임종(臨終)》(臨終|죽음의 자리일본어) 등이 있다. 1931년 4월, 주야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간다에 있는 도쿄 외국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3월까지 그곳에 다녔다.
1933년 12월, 나카하라 주야는 먼 친척인 우에노 다카코와 결혼했고, 1934년 10월에는 첫 아들 후미야가 태어났다. 그러나 1936년 11월, 아들이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나카하라는 신경 쇠약에 빠졌다. 12월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나카하라는 이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나카하라는 1937년 1월 지바시 요양원에 입원했다. 2월에 퇴원하여 가마쿠라로 이사했지만, 1937년 10월, 결핵성 수막염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둘째 아들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고향인 야마구치에 있다.
나카하라 주야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연도 사건 1907년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시모우노레이 촌에서 출생 1909년 아버지 겐스케의 전근에 따라 히로시마로 이주 1912년 가나자와로 이주 1914년 가족은 야마구치로 돌아감, 시모우노레이 심상 소학교 입학 1915년 남동생 아로가 병사, 아버지 겐스케 야마구치로 귀임, 나카하라 가문과 양자 연을 맺음 1917년 아버지 겐스케는 예비역에 편입되어 나카하라 병원을 물려받음 1918년 야마구치 사범 부속 소학교로 전학 1920년 잡지 『부인화보』, 『방장신문』에 투고한 단가가 입선, 현립 야마구치 중학교에 입학 1922년 2명의 친구와 함께 가집 『스에쿠로노』를 간행 1923년 낙제, 리츠메이칸 중학교 제3학년에 전입, 다카하시 신키치 『다다이스트 신키치의 시』를 만나 다다이즘에 경도, 하세가와 야스코를 알게 됨 1924년 토미나가 타로를 만나 프랑스 시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됨 1925년 고바야시 히데오를 만남, 야스코와 함께 상경, 와세다 대학 예과 시험에 실패, 야스코가 고바야시의 곁으로 떠남, 도미나가 타로 병사 1926년 니혼 대학예과 문과에 입학했지만 9월에 퇴학, 아테네 프랑세에 다님, 『산고치』에 『요절한 도미나가』를 기고 1927년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를 만나 음악 단체 술야에 드나들게 됨 1928년 "술야" 제2회 발표회에서 모로이 사부로가 나카야의 시에 작곡한 『아침의 노래』 『임종』이 불림, 아버지 겐스케 사망, 다카다 히로아쓰를 알게 됨 1929년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카 쇼헤이 등과 함께 동인지 『백치군』을 창간 1930년 주오 대학 예과에 편입학 1931년 도쿄 외국어학교 전수과 불어부에 입학, 우에다 도시오를 만남 1933년 『랭보 시집 (학교 시대의 시)』를 미카사 서방에서 간행, 도쿄 외국어학교를 수료, 동인지 『기원』에 참가, 우에노 다카코와 결혼 1934년 장남 후미야가 태어남, 『염소의 노래』 간행 1935년 『역정』이 창간되어 동인이 됨, "푸른 눈"을 『사계』에 발표 1936년 일본방송협회 면접을 보았으나 불합격, 후미야 사망, 차남 요시마사가 태어남 1937년 지바시의 나카무라 고코우 요양소에 입원, 퇴원 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정오기야로 이주,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 계명 방광원 현공 문심 거사 1938년 요시마사 사망, 창원사에서 『지난 날의 노래』를 간행 1972년 유다의 생가가 화재로 소실 1994년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의 생가 터에 나카하라 주야 기념관이 개관 1996년 야마구치시 등이 새롭게 나카하라 주야상을 창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나카하라 주야는 1907년 4월 29일, 야마구치현요시키군야마구치정 오아자 시모우노료(현재의 야마구치시유다온천)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하쿠무라 겐스케는 뛰어난 군의관이었고, 어머니는 나카하라 후쿠였다. 겐스케는 아들이 태어난 직후 나카하라 가문에 입양되어 공식적으로 성을 나카하라로 바꾸었다. 부모는 결혼 후 6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고, 나카하라 가문의 당주에게도 친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남인 주야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사흘에 걸쳐 축하했다. 당시 아버지 겐스케는 군의관으로서 뤼순에 있었지만, 편지로 "츄야"라고 이름을 지어 보냈다.
나카하라는 유명한 의사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의사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2] 아버지의 높은 기대 때문에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겐스케는 마을의 공공 도덕을 걱정하여, 아들이 자신들과 다른 계층의 아이들과 밖에서 노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남동생들과 달리 익사할까 봐 강에서 목욕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2] 성장하면서 심한 처벌도 받았는데, 흔한 처벌은 벽을 보고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담뱃불로 발뒤꿈치를 지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장 큰 처벌은 헛간에 가두는 것이었는데, 츄야는 형제들에 비해 수십 번이나 이 처벌을 받았다.[3]
1914년, 겐스케는 조선의 용산으로 영전했지만, 주야는 어머니와 함께 나카하라 집으로 돌아와 시모우노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신동"이라고 불렸다. 1915년, 동생 아로(쓰구로)가 뇌막염으로 사망하자, 주야는 슬픔에 잠겨 시를 쓰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시적 이력서'에,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죽은 동생을 노래한 것이 바로 처음이다"라고 적고 있다.
1918년, 주야는 야마구치 사범 부속 초등학교(현 야마구치 대학 교육학부 부속 야마구치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이곳에서도 성적이 우수했고, 학급의 인기인이었다. 주야의 부모는 교육열이 높아서, 어머니가 예습 복습을 맡았고, 겐스케는 엄격한 징벌을 가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단가를 짓기 시작하여, 어머니와 함께 '부인화보'에 투고하여 1920년 2월호에서 차선으로 게재되었다. 또한 '보초 신문'(전후에 존재했던 동명의 신문과는 다른 신문)에도 단가를 투고하여 입선했다.
1920년 4월, 야마구치 현립 야마구치 중학교(현 야마구치 현립 야마구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독서에 빠져 성적이 떨어졌고, 2학년 때는 최저 120등까지 떨어졌다. 이때, 주야는 부모에게 숨겨, 보초 신문의 단가회 '스에구로노 회'에 출석했다. 이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시집 '스에구로(스구로)'를 1922년 5월경 간행했다. 주야는 '온천집'이라는 제목의 28수를 수록했다. 음주와 흡연을 배운 "불량 소년"이 되어, 성적은 더욱 하락했다.
1923년, 3학년 유급(낙제)이 결정되었다. 주야는 급우들을 공부방에 모아 만세를 부르고 답안지를 찢었다. 결국 그는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 중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지만, 남은 생애 동안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교토에서 그는 다다이즘 시인 다카하시 신키치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 2. 교토에서의 만남
1923년 4월, 나카하라 주야는 교토의 리츠메이칸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혼자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 다카하시 신키치의 『다다이스트 신키치의 시』를 읽고 다다이즘에 경도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세 살 연상의 여배우 하세가와 야스코와 알게 되어 다음 해부터 동거를 시작한다.
1924년 7월부터 11월까지 교토에 체류한 여섯 살 연상의 시인 토미나가 타로와 친교를 맺었다. 토미나가 타로는 매일 주야의 하숙집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미나가 타로가 의지한 사람은 교토 제국 대학 문학부 국문과에 재학 중이며 리츠메이칸 중학교의 시간 강사를 맡고 있던 토미쿠라 토쿠지로였다. 작문 시간, 시를 써온 주야는 토미쿠라의 집에 불려 가게 되었고, 이윽고 대학생 그룹과 전시회를 보러 가거나 술을 마시는 등 교류를 갖게 되었다. 주야는 "다다 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 3. 도쿄 상경과 문학 활동
교토에서 그는 시인으로서 그를 형성하게 될 많은 영향을 발견했다. 그는 다다이즘 시인 다카하시 신키치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예술 운동은 그의 시적 생활 방식의 일부가 되었고, 나중에 그에게 "다다 씨"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2] 겨울에는 세 살 연상의 여배우 하세가와 야스코를 만났고, 1924년 4월에 그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나카하라 주야가 동료 시인 토미나가 타로와 친구가 된 것도 바로 이 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주야와 야스코는 토미나가 타로를 따라 도쿄로 가서 그곳에서 대학에 다닐 것을 결정했다. 그는 서류 부족이나 늦은 이유로 시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예비 학교에 다닐 것을 조건으로 가족에 의해 보내졌다.[3]
1926년 예비 과정을 중퇴한 후, 그의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그는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다소 난해하고 고백적이며, 시인의 삶 전반에 걸쳐 끊이지 않았던 고통과 우울이라는 일반적인 인상을 준다.
초기에 나카하라는 일본 전통의 단카 형식을 선호했지만, 십 대 시절에 다다이스트 시인 다카하시 신키치와 토미나가 타로가 주창한 현대 자유시 스타일에 매료되었다. 도쿄로 이주한 후, 그는 가와카미 데쓰타로와 오카 쇼헤이를 만나 함께 시 전문 잡지 《백치군(白痴群)》을 창간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의 친구가 되었고, 고바야시는 그에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을 소개해주었으며, 나카하라는 그들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랭보의 영향은 그의 시에만 머물지 않았고, 나카하라는 그의 "보헤미안" 생활 방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나카하라는 일본의 하이쿠와 단카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5음절과 7음절의 수를 차용했지만, 리듬감 있고 음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이러한 음절 수를 변형하여 빈번하게 사용했다. 그의 시 중 몇 편은 노래 가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음악적 효과는 처음부터 신중하게 계산되었을 수 있다. 레이첼 듀마스에 따르면 나카하라는 자신의 시에서 종종 "혼란, 권태, 분노, 우울, 무관심"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의 시 중 일부에서는 고독에 대해, 그리고 삶이 얼마나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종종 인간과 그들이 우리 마음 밖의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로움을 표현했다. 기독교가 주를 이루는 현에서 자란 나카하라는 시에서 종종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시에서 그는 영적인 세계와 다른 세계, 즉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4] 주야의 작품은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고, 그는 주로 고바야시 히데오와 함께 창간한 《야마마유》를 포함한 소규모 문학 잡지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는 1925년 11월 하세가와 야스코가 나카하라를 떠나 고바야시 히데오와 함께 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고바야시와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이 사건은 그의 친구 토미나가 타로를 잃은 직후에 일어났다. 1927년 12월, 그는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를 만나 나중에 그의 시를 음악으로 각색했는데, 예를 들어 《아사의 노래(朝の歌)》(朝の歌|아침의 노래일본어)와 《임종(臨終)》(臨終|죽음의 자리일본어) 등이 있다. 1931년 4월, 주야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간다에 있는 도쿄 외국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3월까지 그곳에 다녔다.[5]
2. 4. 결혼과 창작 활동
1933년 12월, 나카하라 주야는 먼 친척인 우에노 다카코와 결혼했다. 1934년 10월에는 장남 후미야가 태어났으나, 1936년 11월에 결핵으로 아들을 잃고 신경 쇠약에 빠졌다.[5] 1937년 12월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의 후기 시 중 많은 작품들이 이 엄청난 고통을 기리고 완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나카하라 주야는 1929년 4월, 가와카미 데쓰타로, 무라이 야스오, 오카 쇼헤이 등과 함께 동인 잡지 『백치군』을 창간했다.[4] 『백치군』은 『염소의 노래』에 수록될 시와 번역을 매호 발표했지만, 나카하라 주야가 오카 등과 다투면서 이듬해 4월에 6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이후 시 창작이 멈췄다.
1930년 9월, 주오 대학 예과에 편입했다. 1931년에는 도쿄 외국어학교 전수과 불어부에 입학했다. 1932년 6월, 첫 시집 『염소의 노래』 출판을 계획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1933년 3월, 도쿄 외국어 전수과를 졸업하고, 랭보 시집을 번역하여 출간했다.
1934년 11월, 『염소의 노래』가 출판되었다. 1935년, 『문학계』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단과 교류했다. 1936년에는 『랭보 시초』를 간행하여 처음으로 인세를 받았다.
2. 5. 요절
나카하라는 1933년 12월에 먼 친척인 우에노 타카코와 결혼했고, 1934년 10월에는 첫 아들 후미야가 태어났다.[5] 그러나 1936년 11월, 아들이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나카하라는 신경 쇠약에 빠졌다.[5] 12월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나카하라는 이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5] 이후 그의 많은 시들은 이 엄청난 고통을 기리고, 또 그 고통을 덜어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나카하라는 1937년 1월 지바시의 요양원에 입원했다.[5] 2월에 퇴원하여 가마쿠라로 이사했지만, 1937년 10월, 결핵성 수막염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5]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둘째 아들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고향인 야마구치에 있으며, 발표되지 않은 시 蟬|Semi일본어에 등장하는 바로 그 가족 묘이다.
3. 작품 세계
나카하라는 일본의 하이쿠와 단카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5음절과 7음절의 수를 차용했지만, 리듬감 있고 음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이러한 음절 수를 변형하여 빈번하게 사용했다. 그의 시 중 몇 편은 노래 가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음악적 효과는 처음부터 신중하게 계산되었을 수 있다. 레이첼 듀마스에 따르면 나카하라는 자신의 시에서 "혼란, 권태, 분노, 우울, 무관심"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의 시 중 일부에서는 고독과 삶의 어두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과 외부 세계의 연결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로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주를 이루는 환경에서 자란 나카하라는 시에서 종종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4]
1929년 4월, 나카하라 주야는 가와카미 데쓰타로, 무라이 야스오, 우쓰미 세이이치로, 아베 로쿠로, 후루야 쓰나무, 야스하라 요시히로, 오카 쇼헤이, 도미나가 지로와 함께 동인 잡지 『백치군』을 창간했다. 이후 『염소의 노래』에 수록될 시와 번역을 매호 발표했지만, 나카하라가 오카, 도미나가 지로와 다투거나 원고가 잘 모이지 않게 되면서 이듬해 4월 6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시 창작이 멈춘 "와신상담"의 시기가 있었다.
1933년 12월, 미카사 서방에서 『랭보 시집 <학교 시대의 노래>』를 번역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그의 최초 상업 출판이었다. 이 책의 판매로 나카하라는 고바야시 히데오와 함께 랭보의 대표적인 번역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나카하라 주야의 시는 상경 후 "아침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랭보, 베를렌과 같은 상징주의풍이었다.[15] 이후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 『봄과 수라』를 접하고, 불가사의한 우주관과 구어체로 된 울림에 매료되었다.
생전에 나카하라 주야는 『염소의 노래』의 시인으로서 고바야시 히데오, 가와카미 데쓰타로 등 친구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무로오 사이세이, 쿠사노 신페이, 하고하라 사쿠타로 등도 그의 독특한 노래 세계를 귀중하게 여겼다. 사후에는 『문학계』, 『기원』, 『사계』 등에서 잇따라 추도호를 기획하여 나카하라 주야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었다.
4. 주요 작품
나카하라 주야는 초기에 일본 전통 단카 형식을 선호했지만, 다카하시 신키치와 도미나가 타로의 영향으로 현대 자유시 스타일로 변화했다.[4]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카 쇼헤이와 함께 시 전문 잡지 《백치군》을 창간하기도 했다.[4] 그의 시는 난해하고 고백적이며, 고통과 우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4]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의 영향을 받아 보헤미안적인 생활 방식으로도 알려졌다.[4]
나카하라는 작품에서 고독과 어둠, 인간과 세상의 연결에 대한 경이로움 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했다.[4] 그의 작품은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지만, 고바야시 히데오와 함께 창간한 《야마마유》를 통해 주로 발표되었다.[4]
4. 1. 시집
4. 2. 번역
나카하라 주야는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4] 1934년 분포당에서 다카무라 고타로의 장정으로 『염소의 노래』가 출판되었다.[4] 1935년 『염소의 노래』는 호평을 받아 시단과 교류하며 원고 의뢰도 들어왔다.[4] 1936년 6월 25일, 야마모토 문고에서 『랭보 시초』가 간행되었으며, 생애 처음으로 인세를 받았다.[4] 1937년 9월 15일, 노다 서방에서 번역 시집 『랭보 시집』이 간행되어 판매 호조를 보였다.[4]
나카하라 주야의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 | 출판사 | 출판년도 |
---|---|---|
『랭보 시집(학교 시대의 시)』 | 미카사 서방 | 1933년 |
『랭보 시초』 | 야마모토 서점〈야마모토 문고 17〉 | 1936년 |
『랭보 시집』 | 노다 서점 | 1937년 |
《염소의 노래》 | 필요한책 | 2019년 8월 26일(원문 수록)/2021년 4월 9일(원문 미수록) |
《지난날의 노래》 | 필요한책 | 2021년 4월 9일 |
5. 평가 및 영향
나카하라 주야는 생전에 주류 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가 가진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특성은 오늘날까지도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넓고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다. 그의 시집 중 생전에 출판된 것은 《염소의 노래》(山羊の歌|야마노우타일본어, 1934) 단 한 권뿐이었지만, 사후 그의 작품은 고바야시 히데오와 오카 쇼헤이 등의 노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6]
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 주야의 미발표 시, 일기, 편지 등을 모아 《나카하라 주야 전집》을 편집하여 출간하였고,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각종 문고와 시가 전집에 수록되어 널리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1996년, 야마구치 시는 세이도샤와 카도카와 쇼텐의 지원을 받아 나카하라 주야 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신선한 감성"을 특징으로 하는 뛰어난 현대 시집에 매년 수여되며, 수상자에게는 100만엔의 상금이 주어진다. 수상작은 영어 번역판으로도 출판되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중단되었다.
애시드 포크 가수 토모카와 카즈키는 나카하라 주야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내 안에서 멈추지 않는 노래》와 《나카하라 주야 작품집》이라는 두 개의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나카하라 주야의 성격에 대해, 그의 남동생은 "농에서 나와 입신한 아버지의 '거친 피'와 봉건 신하로서 도태된 어머니 쪽의 '조용한 피'의 혼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 주야의 광대 기질은 일종의 항의 표현이며, 장난기 많고 독설을 즐기는 면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나카하라 주야는 의심이 많고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영혼의 아름다움과 함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사악한 것이 있었다"고 평가했다.[18]
현재 널리 알려진 나카하라 주야의 검은 모자 사진은 복사와 수정을 반복하여 실제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는 증언도 있다.[19]
6. 나카하라 주야 상
1996년, 야마구치시는 나카하라 주야를 기리기 위해 출판사 세이도샤와 카도카와 쇼텐의 지원을 받아 나카하라 주야 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신선한 감성"을 특징으로 하는 뛰어난 현대 시집에 매년 수여된다. 수상자는 100만엔의 상금을 받으며, 수년 동안 수상작은 영어 번역판으로도 출판되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상 운영진은 수상작 번역을 중단했다.
나카하라 주야가 사망한 다음 해부터 《사계》 지상에서 시인에게 수여된 상이 있었다. 발안자는 하세가와 야스코였으며, 남편 나카가키 타케노스케가 원조했지만, 3회로 종료되었다. 현재 야마구치 시가 주최하는 "나카하라 주야 상"과는 별개의 것이다.
7. 기타
나카하라 주야는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염소의 노래》를 자비로 출판했으며, 죽기 직전 두 번째 시집 《지난 날의 노래》를 편집했다. 그는 주류 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특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일본 학교에서 학습 대상이 되기도 하며, 모자를 쓰고 멍한 시선을 한 그의 초상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19]
나카하라 주야 사후, 고바야시 히데오는 그의 작품을 홍보하는 데 기여했고, 오카 쇼헤이는 미발표 시, 일기, 편지 등을 모아 《나카하라 주야 전집》을 편집했다.
1996년, 야마구치 시는 세이도샤와 카도카와 쇼텐의 지원을 받아 나카하라 주야 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신선한 감성"을 특징으로 하는 뛰어난 현대 시집에 매년 수여되며, 수상자에게는 100만엔의 상금이 주어진다.
토모카와 카즈키는 나카하라의 시를 가사로 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카하라 주야의 이름은 모리 오가이가 지어줬다는 설과 나카무라 료쿠야에게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17] 그는 자신의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카하라의 대표작 "서커스"는 본인에게도 자신작이었으며,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낭독을 들려주곤 했다. 그는 "유안 유욘 유야유욘"이라는 의성어를 독특하게 노래했다.
나카하라의 유족에 따르면, 그는 도쿄의 교우 관계를 과장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이는 부모님께 송금을 계속 받아 도쿄에 거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검은 루바시카, 검은 종 모양 망토, 검은 소프트 모자 등 검은 옷차림을 즐겨 입었다. 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가 광대처럼 행동하며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것을 즐겼다고 회상했다.[18]
아라시야마 미츠사부로가 오카 쇼헤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현재 널리 알려진 나카하라의 초상 사진은 복사와 수정을 거쳐 실제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고 한다.
나카하라는 대학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가명을 써서 부모님께 송금을 계속하도록 조작하기도 했다.[20] 22세 때는 가로등을 부숴 15일 동안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아오야마 지로가 개점한 술집 "윈조아"는 나카하라가 매일같이 시비를 걸고 싸움을 벌여 1년 만에 망했다. 사카구치 안고는 "윈조아"에서 나카하라를 처음 만났는데, 나카하라가 덤벼들었지만 덩치가 큰 안고에게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21][22]
오카 쇼헤이는 술에 취한 나카하라에게 맞은 적이 있으며,[17] 나카무라 미쓰오는 맥주병으로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나카하라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깎아내려진 후 그를 멀리하게 되었지만,[23][24]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재능을 아쉬워했다.[25]
나카하라 주야의 시는 모로이 사부로 등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26]
카이엔타이의 노래 '생각하면 멀리 왔구나'는 나카하라 주야의 시 '고집 없는 노래'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다.
'더러워진 슬픔에…'는 오오타카 시즈루, 쿠와타 케이스케 등에 의해 곡이 붙여졌다.
최근에는 야부타 쇼이치가 나카하라 주야의 시에 의한 가곡을 다수 작곡하고 있다.
친족·지인에 의한 저작
- 나카하라 후쿠 저, 무라카미 마모루 편 『나에게 내리는 눈은, 나의 아이 나카하라 주야를 말하다』
- 나카하라 시로 『나카하라 주야 노트』, 『형 나카하라 주야와 조상들』
- 나카하라 고로 『바다의 여정 주야·산토카의 일』
- 가와카미 데쓰타로 『나의 나카하라 주야』
- 오카 쇼헤이 『나카하라 주야』, 『삶과 노래 나카하라 주야 그 후』, 『나카하라 주야의 시의 세계』
- 하세가와 야스코 저, 무라카미 마모루 편 『가고 돌아오지 않는 나카하라 주야와의 사랑』
- 야스하라 요시히로 『나카하라 주야의 편지』
- 노노가미 게이이치 『문고당 이야기 나카하라 주야의 것들』, 『주야 노트 나와 나카하라 주야』
- 노다 신키치 『나카하라 주야 나의 청춘의 표박』
영화 및 드라마
- 영화 《화택의 사람》
- TV 드라마 《더러워진 슬픔에》
- 《ETV 스페셜 대도쿄의 한가운데서, 혼자서~시인 나카하라 주야를 걷다~》
- AC 재팬 2015년도 결핵 예방회 지원 캠페인 "JOY와 위인"
- 영화 《[https://www.yukitekaheranu.jp/ 갈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8. 한국과의 관계
1914년, 아버지 나카하라 겐스케가 조선의 용산으로 전근했지만, 학령에 달했던 주야는 어머니 후쿠와 함께 나카하라 가문으로 돌아와 지역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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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也の生家の直ぐ側の温泉旅館。1906年創業。中原中也賞の選考は、毎年ここで行われていたが、2017年6月負債3億2千万円で破産。毎日新聞2017年6月9日
https://mainichi.jp/[...]
201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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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から昭和にかけての作家で、医師、異常心理の研究者であった[[中村古峡]]が、千葉に開院した病院。現在は、中村古峡記念病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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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中也記念館・企画展示「中也の兄弟たち」(平成20年12月17日(水)〜平成21年4月19日(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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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州経済連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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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中也記念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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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 拾郎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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